티스토리 뷰
대한민국 최초의 메이저리그 선수로 은퇴하기 직전에는 한화 이글스의 투수로 뛰었고 현재 미국 내셔널리그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국내 야구 역사상 최고의 투수로 평가받고 있는데 한국인 최초로 MLB에 진출하여 활약을 펼쳤으며 1994년 LA 다저스에서 데뷔로 시작해 2005년에 100승을 기록하였고 2010년도에는 124승을 거둬 노모 히데오를 제치고 MLB 동양인 최다승 투수로 기록 또한 그는 한국 선수 중 유일하게 한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 세 리그에서 모두 선발로 MLB와 마이너 리그 그리고 일본의 프로 야구와 한국 프로 야구에서 활동하며 통산 156승의 성적을 거두는 엄청난 성과를 보였는데 이 선수의 최고 전성기는 많은 정상급 타자들이 약물을 복용하여 타고투저 현상이 극심하던 1997년에서 2001년 사이로 당시 그는 LA 다저스에서 통산 75승을 거뒀는데 그는 이 기록을 세우는 동안 시속 99마일에 육박하는 강속구와 타자들의 헛스윙을 유도하여 슬러브 및 파워 커브로 연평균 15승과 200이닝 등 방어율 성적을 기록해내 당시 내셔널리그 우완 최고 투수 중 한 명이라 평가받으며 MLB 올스타에 선정됐는데 98년도 아시안 게임에서는 대표팀 에이스로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을 이끌었고 금메달을 획득하여 병역 면제를 2006년에 제1회 WBC에 참가해 1승과 3세이브 무실점을 기록하며 4강 진출을 2010년을 끝으로 MLB에서의 경력을 마감한 그는 2011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에서 활동하다가 그리고 2012년에는 자신의 오랜 꿈이었던 고향 팀 한화 이글스에서 선수 생활의 대미를 장식하고 같은 해에 은퇴하였습니다.
박찬호
어린 시절
1973년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운동신경이 남달랐는지 교사의 추천으로 공주중동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를 시작해 2013년 출연한 무르팍 도사에서 했던 말로 그 당시 야구부는 라면을 먹을 수 있어 그 라면이 먹고 싶어서 야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으며 어려웠던 자신의 집안 사정으로 그렇게 배불리 먹지는 못하여 어릴 적부터 야구선수로 성공하겠다는 다짐으로 타석에 들어섰을 때 공에 대한 공포를 견디기 위해 스스로 공동묘지에 가서 담력훈련과 배트로 연습을 했다는 얘기는 요즘도 종종 회자되곤 하는데 또한 하체를 단련하기 위해서 공주 산성을 토끼 뛰기를 하며 올라갔다가 내려왔다는 엄청난 훈련의 이야기가 유명한데 중학교 3학년 시절 투수로 포지션을 바꾸었고 투수 전업 전까지 박찬호는 삼루수로 얼마나 잘했으면 당시 야구부 감독이 학부모들에게 왜 전향시키냐고 욕을 먹고 경질까지 당했으며 게다가 박찬호의 반대급부로 삼루수 전업을 했던 홍원기는 당시 공주중 야구부의 에이스였는데 동기로 홍원기와 손혁은 당시 공주고등학교 야구부의 주된 선수들로 특히나 홍원기는 나중에 자신의 결혼식에 초대한 유일한 한국 야구인일 정도로 각별한 사이로 박찬호가 지금의 부인을 처음 만날 때 3명의 지인을 데리고 왔는데 션과 한양대 2년 선배 류지현 그리고 홍원기라고 할 정도로 애틋하고 각별한 사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특징
플레이 스타일을 보면 주된 기술은 빠른 강속구와 엄청난 힘의 커브와 슬로 커브 그리고 슬러브로 특히나 파워 커브는 메이저 최고의 명품 기술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는데 오렐 허샤이저에게 전수받은 것으로 상당히 인정받고 있으며 이 선수의 커브는 2000년도와 01년도에 2년 동안 메이저리그 단장과 감독이 선정한 최고의 커브 기술로 부문 3위를 했을 정도로 대단한 실력을 선보였고 삼루수 출신답게 수비 실력도 굉장히 특출 나고 현재까지도 패스트볼의 구위만으로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압도하는 실력의 동양인 선발투수는 박찬호와 노모선수 둘 뿐이며 옛날이나 현재나 동양인 투수는 힘이 약하다는 편견이 있는데 박찬호의 플레이 스타일은 동양인 투수 중 굉장히 이례적으로 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 투수의 반열에 안타깝게도 오르지 못했지만 전성기 당시에는 리그에서 1위와 2위의 선발급 실력을 보유했으며 박찬호는 전성기 시절 97마일을 최소 5번 이상 나와 이러한 강속구에 80마일 중반의 파워커브 레퍼토리는 분명 기교파 투수와는 거리가 있는데 전성기 시절이었던 98 시즌 전후보다 오히려 직구의 구속과 구위가 더 압도적이었던 96년도와 97년도 연간의 박찬호는 경기에서 평균 95마일 이상의 직구를 던지며 경기 후반까지도 97마일에서 98마일의 직구를 던지는 모습을 종종 보였고 내셔널리그에서도 손꼽히는 강속구 투수 중 한 명으로 당시 박찬호의 투구를 두고 USA 투데이의 저 유명한 메이저리그 칼럼니스트는 80년대 중후반을 장식했던 강속구 투수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고전적인 강속구 투수라고 평가한 일이 있을 정도였으며 박찬호 선수가 빠른 공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 장거리 달리기를 매일 같이하여 하체가 발달되어 있다는 것과 국내에서 금기시한 키킹 동작을 해온 것인데 국내에서 선호하지 않았던 키킹을 시도했다는 것도 굉장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박찬호 선수는 국가대표로서의 자부심이 굉장히 강했던 선수였는데 현역 선수 시절에 한국 야구계가 참가하는 각종 국제 대회에 빠진 적이 없으며 빠질 때도 굉장히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이며 한국 야구가 세계 수준에서 활약하는 데에 노력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는데 한국인으로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첫 투수이자 자신의 행동이 한국에 대한 이미지에 영향이 간다고 생각하여 더욱 올바른 자세를 보이려 노력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참고 논문: 위키백과
'스포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내 최초 푸스카스상을 받은 선수 손흥민 (0) | 2022.01.31 |
---|---|
역사상 최고의 쿼터백 조 몬태나와 톰 브래디 (0) | 2022.01.25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26년간 이끌어온 감독 퍼거슨 (0) | 2022.01.24 |
뛰어난 실력과 외모까지 겸비한 얼음 여왕 국민 여동생 김연아 (0) | 2022.01.23 |
국내에서도 많은 인기와 유명세를 차지했던 데이비드 베컴 (0) | 2022.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