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홈런 왕 베이브 루스
전설적인 홈런 왕 베이브 루스 베이브 루스라는 별명으로 더 널리 알려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전설적인 홈런왕으로 보스턴 레드삭스의 투수로서 메이저 리그 경력을 시작하였고 리그 최고의 좌완투수였지만 타격에도 엄청난 잠재력을 보여 1918년부터 2 시즌 정도 겸업을 하기도 했으나 1920년 뉴욕 양키스로 이적한 후엔 타자로 역할을 바꿨으며 이 선수는 모든 부분에서 역대 최고였지만 특히나 홈런을 치는 능력은 사상 최고로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방대한 양의 홈런으로 단타 위주의 시대였던 데드볼 시대를 끝내고 홈런의 시대인 라이브볼 시대를 개척했으며 소속 팀 양키스도 그의 활약과 관중 동원력을 바탕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야구 선수로 여겨지는데 또한 그는 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1936년에 처음으로 시행된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서 루스는 타이 콥과 호너스 와그너 그리고 크리스티 매튜슨 등과 함께 올라가 있습니다.
홈런의 전설
베이브 루스의 어린 시절
1895년 미국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5살 때부터 입 담배를 질겅거리던 문제아였던 왼손잡이 소년 루스는 1902년 자신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가톨릭 교회 수도사들이 운영하는 성모 마리아 직업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지내는 12년 동안 루스는 자신의 인생을 바꾼 사람인 로마 가톨릭 사제의 한 신부를 만나게 되었고 그 신부에게 야구를 배우게 되었는데 또래보다 배는 큰 덩치를 지녔던 루스는 지역에서 가장 야구를 잘하는 작은 선수였으며 한 지역의 8백여 학생으로 구성된 40여 개 팀의 작은 메이저 리그가 구성돼 있었고 루스는 처음에는 포수의 역할로 다시 왼손 투수로 뛴 루스는 세인트 메어리 공업학교를 나설 무렵인 1913년에는 아마추어팀이나 세미프로팀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결국 정규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프로 팀들의 주목까지 받게 되었고 마침내 보스턴 레드삭스는 루스를 영입하게 되었습니다.
별명 베이브의 탄생과 첫 프로
1914년 루스는 메이저리그 팀인 볼티모어 마이너리그 계약을 하였고 그의 유명한 별명인 베이브는 당시 이 팀에서 생겨난 별명으로 루스가 세상 물정 모르고 늘 감독 곁에 따라다니고 레스토랑에서 외식 그리고 호텔에 있을 때 기차를 탈 때의 적절한 예의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별명이 붙여진 것으로 루스는 1914년 스쿼드 경기에 프로 야구 선수로 처음 출전을 하였고 그는 투수를 맡으며 15대 9로 승리한 경기에서 2이닝을 던졌고 또한 타자로서도 두 번째 타석에서 우전 적시타를 기록 이후 루스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시범경기를 치렀는데 루스는 중간에 투수로 3이닝을 던지며 4회에 2 실점을 내줬지만 이후 안정을 찾고 5회와 6회를 무실점이었으며 정규시즌이 시작되자 루스는 투수로 재능을 드러냈는데 팀은 좋은 성적을 보였지만 언론에게는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양키스
1920년 이적 첫 해에 홈런 54개를 기록하며 타자로서의 풀타임 첫 해였던 이전 해에 자신이 기록했던 메이저리그 홈런 기록 29개를 다시 기록하였으며 풀타임 첫 해에 메이저리그 홈런 기록을 경신하고 2년 동안 25개의 홈런을 쳐내 2배 가까이 기록을 늘려놓은 것으로 1920년의 홈런 순위를 보면 54개의 루스 다음 2위는 19개의 조지 시슬러로 한 마디로 루스는 혼자서 놀고 있었으며 1921년에 우승 후 팀 동료들과 함께 친선경기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5월까지 출장정지를 받은 루스는 복귀 후에도 관중석 난입 후 퇴장 그리고 부진 등으로 주장 자리까지 뺏기며 실망스러운 시즌을 보냈고 1923년은 그에게 명예를 되찾는 해로 루스는 커리어 하이 3할 9푼 3리란 엄청난 타율과 함께 또다시 홈런왕이 되었으며 월드시리즈에서도 맹활약하며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현대에 미치는 영향
루스는 엄청난 대중의 찬사를 받은 최초의 야구 스타로 루스가 등장하여 홈런을 비롯한 시원한 플레이 스타일로 국민들의 힘든 일들을 잠시 잊을 수 있게 해 주었으며 한 사람은 루스가 미국 최대 도시에서 전례 없는 운동선수의 위업을 발휘할 수 있는 인생보다 더 큰 인물이라고 주장했으며 루스는 1920년대 초를 장식한 사회 변화의 아이콘이 되었고 글렌 스타우트는 루스는 절대 막을 수 없는 뉴욕의 화신이라고 쓰고 있는데 이 선수의 일생 동안 루스는 미국의 상징이 되었으며 베이브 루스의 홈런은 그 자체로 어떤 것이든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평가했습니다.
경매의 루스의 유산
지금까지 경매에서 팔린 스포츠 기념품과 야구 기념풍 중 가장 비싼 몇 가지 물건들은 루스의 것이 있는데 2016년 현재 가장 비싼 스포츠 기념품은 루스의 1920년형 양키스 저지로 2012년 441만 5658달러에 가져갔고 이 선수가 양키스타디움에서 처음 홈런을 친 방망이는 2004년 12월에 126만 5,000달러에 들여온 경매에서 가장 비싼 야구방망이로 기네스북에 올라있으며 1934년 시즌 이 선수가 썼던 모자는 2012년 데이비드 웰스가 53만 7278달러에 경매에 내놓았을 때 야구모자 기록을 2017년 찰리 쉰은 루스의 1927년 월드시리즈 반지를 경매에서 209만 3927달러에 팔았고 그것은 줄리어스 어빙의 1974년 ABA 챔피언십 반지가 2011년에 46741달러에 팔렸을 때의 기록보다 훨씬 높게 올라갔습니다.
1932년 뉴욕 월드시리즈 3차전에서 예고 홈런 전설은 말 그대로인데 루스가 홈런을 날리는 데는 공 하나이면 충분하다고 경기 전에 장담하기는 했지만 그날 경기를 지켜본 한 기자가 별생각 없이 끼운 일이 전설로 만들어졌는데 베이브 루스는 홈런을 치고 헐렁한 바지로 베이스를 돌기도 하였습니다.
참고 논문 :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