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 게임의 탄생과 유래 제 1회부터 5회까지 개최국 모아보기
4년마다 열리는 아시아의 국가들을 위한 종합 스포츠 대회로 현재 아시안 게임은 아시아 올림픽 평의회가 국제올림픽위원회의 감독 아래 주관하고 있으며 종목마다 메달이 수여되고 있는데 1950년에 시작된 전통을 따라 1등은 금메달 그리고 2등은 은메달 3등은 동메달이 선수에게 수여됩니다.
아시안게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아시아 여러 나라의 우호와 세계평화를 촉진할 목적으로 창설된 국제 스포츠대회로 대회의 전신은 극동 선수권대회와 1934년 인도 뉴델리에서 인도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스리랑카와 팔레스타인이 참가하여 열린 서아시아 경기대회가 합병하여 부활한 것 극동 선수권대회는 1913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동양 올림픽대회가 그 기원입니다.
탄생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 국가들이 독립하기 시작으로 아시아의 신생 독립국들은 무력이 작용하지 않으면서 상호 간의 이해로 발전할 새로운 종류의 경쟁을 원하여 1948년 8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제14회 하계 올림픽 경기 중 인도의 IOC 위원인 두트 손디는 아시아의 스포츠 선구자들에게 아시안 게임에 관한 논의를 하자고 제안함에 따라 참가국 중 대한민국과 필리핀 그리고 미얀마, 중국, 인도, 스리랑카의 6개국이 대회를 개최할 것을 합의가 되었고 1949년 몇몇 나라가 더 참가하여 아시아 선수권 연맹을 창시하여 아시아 경기 대회를 개최할 것을 합의하여 1950년 인도 뉴델리에서 제1회 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으나 대회 준비 미흡과 복잡한 국내외 사정에 따라 제1회 대회는 1년 연기된 1951년에 열렸습니다.
개최와 고난
아시아 여러 나라의 참가가 이어지면서 회를 거듭하면서 참가국이 늘어나며 대회 규모도 확대되었는데 회원국들 사이의 정치적 대립으로 대회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는데 1962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제4회 대회에서는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의 출전을 반대하여 이스라엘은 참가하지 못했고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로 중화민국의 참가가 제한되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참가하지 못했는데 이후 이 문제는 이스라엘과 중화민국 참가 문제로 인해 논란이 계속돼 1966년 태국 방콕에서 열린 제5회 대회에 이스라엘과 중화민국이 참가하자 아랍 국가들이 대회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이스라엘은 1974년 대회를 끝으로 이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고 아랍 국가들이 주도하여 아시아 경기 연맹에서 축출되어 유럽 올림픽 위원회로 옮겨 아시아 경기 대회 참가 자격을 잃었습니다.
개최지 문제
1970년 제6회 대회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마찰이 있었고 1978년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열릴 예정이던 제8회 대회는 인도와 방글라데시와의 대립이 개최지 변경의 중요한 이유가 되었는데 결국 이들 두 대회는 아랍 산유국을 중심으로 한 재정 지원으로 태국 방콕으로 개최지를 옮겨 열렸습니다.
성장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하면서 지리적으로 아시아에 속하는 독립국이 된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그리고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이 아시아 올림픽 평의회에 가입하게 되고 이들 5개국은 1994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제12회 대회에 처음 참가했으며 민족적, 문화적 문제 등으로 일부 국가들이 이들 국가 참여를 반대하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구 소련의 스포츠 전통을 이어받은 이들 국가의 참여로 경기력 향상이라는 좋은 결과를 가져왔고 2006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제15회 대회에서는 45개국의 39개 종목 15000여 명의 선수가 참가하는 대규모 대회로 성장하였는데 한편 이 대회에 오세아니아의 오스트레일리아가 참가 신청을 했으나 아시아 올림픽 평의회 의장인 셰이크 아메드 알 파고드는 이를 거부였는데 그 이유는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아시안 게임 참여가 아시안 게임의 질적 향상을 가져올 수는 있지만 오세아니아에 속한 국가의 국가 올림픽 위원회에게는 공정하지 못한 처사하고 거부하였습니다.
개최지로 보는 역사
제1회 뉴델리 대회
1951년 3월 4일부터 8일간 인도의 뉴델리에서 아시아경기 연맹 가입국 중 11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거행되었으며 이 대회에 한국은 6·25 전쟁으로 참가하지 못하고 헬싱키 올림픽 경기대회 기간 중인 1952년 7월 24일 아시아경기연맹 총회에서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하였습니다.
제2회 마닐라대회
1954년 5월 1일부터 9일간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18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으며 우리나라는 이 대회에 최초로 임원 21명과 선수 57명의 대표단을 파견하였고 육상 1,500m 종목에 출전한 최윤칠 그리고 1만 m에 출전한 최충식이 각각 금메달을 획득하였고 역도경기에 출전한 유인호와 조봉직 그리고 김창희 그 외 고종구, 박금현, 김성집 선수들도 금메달을 획득하여 일본과 필리핀에 이어 종합 3위를 차지하였습니다.
제3회 도쿄대회
1958년 5월 24일부터 6월 1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20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으며 우리나라는 이 대회에 13개 종목에 걸쳐 120명의 선수를 파견하여 종합성적 3위를 차지했으며 이창훈의 마라톤 우승과 자전거 도로경기에서의 전승은 재일 동포에게 뜨거운 민족애를 일깨워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4회 자카르타 대회
1962년 8월 24일부터 9월 4일까지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1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으며 이 대회는 개최국인 인도네시아가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자유중국과 이스라엘에 참가신청서를 발송하지 않아 아시아의 평화와 친선을 도모하는 근본적인 아시아 경기 이념을 훼손시켰고 또한 주최국이 대회 운영을 독단적으로 행하여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습니다.
제5회 방콕 대회
1966년 12월 9일부터 20일까지 태국의 방콕에서 18개국 2500명의 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고 우리나라는 13개 종목에 선수 182명과 조사단과 경기 임원 그리고 예술단 및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 서울 유치 업무단 등 모두 93명을 파견하였습니다.
지금까지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아시안 게임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선수들의 희망이 되고 있습니다. 집에서 응원을 하고 울고 웃는 과정에서 모두가 한 마음이 되는 걸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스포츠 대회입니다.
참고 논문 : 나무위키